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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일기 - 16부

이비자 0 2571 0 0


귀농 일기 - 16부.



처제와의 대화를 정리해 보았다. 그 놈을 만나고 있다는 것은 시인했다. 하지만 단순히 거래처 사장님이라고 선을 그었다. 처제도 아내가 이상하다는 것은 감지하고 있다. 하지만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더구나 그 불륜 상대가 그 사장 놈이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는 눈치다. 마음속으로, 침착해야 한다. 냉정해야 한다고 주문을 걸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아내의 컬러링은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다.



“여보세요. 당신이야.”

“응~”

“별일이네. 생전 전화도 잘 안하는 사람이 전화를 다 주고.”

“그냥 보고 싶어서.”

“보고 싶으면 올라오면 되지. 거기서 서울이 얼마나 된다고.”

“나도 가고 싶지. 근데 벌려놓은 일이 많아서 시간내기가 쉽지 않네.”

“당신은 어떻게 직장생활 할 때 보다 거기서가 더 바빠.”

“글세 말이야. 죽도록 일이나 하라는 팔자인가 보지.”

“어유~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무슨 일이야.”

“사실은 말이야. 조금 전에 처제하고 통화 했거든.”

“경서랑? 별일이네. 둘이 그리 친하지도 않잖아?”

“저번에 서울 갔을 때, 장모님이 처제가 만나는 남자가 있는 눈치데, 물어도 대답도 안한다고 나보고 한번 알아보라고 하셨거든.”

“남자를 만나? 예이~ 단순한 친구일 거야. 경서! 예전부터 영양가 없는 놈들 많이 만나고 다녔잖아.”

“이번에는 그게 아닌 것 같아. 거래처 사장님이라고 하던데, 직업이 뭐라고 하더라. 보석중개상이라고 하던가?”

“보석중개상! 보석류 수입해서 판매하는 그런 사람 말하는 거야.”

“응~ 대충 그렇게 들었어. 혹시 당신에게는 말 안 해.”

“요즘에 둘 다 바빠서 얼굴본지 오래됐어.”

“아니 어떻게 매일 처갓집에 가면서 얼굴도 못 봐~”

“글세 말이야. 내가 빨리 들어가는 날은 경서가 늦고, 내가 늦는 날은 경서가 빨리 들어오고 자꾸 엇갈려, 그러니 얼굴을 볼 수가 있나?”

“결과적으로 당신도 처제가 만나는 남자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거네.”

“그런 샘이지.”

“혹시 나쁜 놈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예이 설마. 경서 나이가 몇인데, 경서도 사람 보는 눈은 있겠지.”

“나도 그렇게는 생각해. 하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알아봐~ 장모님 걱정하시더라.”

“알았어. 만나면 한번 물어볼게. 여보. 그만 끊어야겠다. 손님이 오셨네.”

“그래 알았어. 또 전화할게.”



아내와의 통화도 끝났다. 처제가 만나는 그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말이 있었다. 처제와 아내의 귀가 시간이 엇갈린다고 했다. 놈이 자매를 번갈아가며 능욕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 심정 같아서는 당장 놈의 심장을 시퍼런 칼날로 후벼 파버리고 싶다. 어느덧 시간이 흘려 붉은 노을이 강물에 반짝거린다. 이곳에 멍하니 앉아 있은 지도 2시간이 훌쩍 지난 모양이다. 흥신소에서 받아온 봉투를 차에서 꺼내 다시 주저앉았다. 다시 보아도 억장이 무너지는 장면에 분노가 치밀지만 애써 진정하며 라이터를 꺼냈다.



사진이 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타오른다. 한 장, 또 한 장, 사진은 시커먼 재가 되지만 머리에 각인된 모습은 평생을 가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한줌의 재로 변한 사진들을 발로 뭉겨버리고 차에 오른다. 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원초적 감정 따위는 지워버렸다. 놈이 어떤 감언이설로 꼬드긴 건지는 몰라도 선택은 아내와 처제가 한 것이다. 또한 따지고 보면 나또한 정당한 놈은 아니다.



자체가 불쌍하지만 그녀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 따위는 없다. 아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래도 끝내 내가 내민 손을 뿌리친다면 그때는 정말 끝이다. 전화벨이 울린다. 시간이 늦도록 연락이 없으니 연변댁이 전화를 한 모양이다. 웃긴다. 마누라는 다른 놈에게 빠져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는데, 불륜관계인 연변댁은 끔찍이도 나를 챙긴다.



“여보세요.”

“이장님! 어디계세요.”

“별일 없죠. 한 30분 정도면 들어갈 겁니다.”

“연락이라도 해 주시지, 걱정했잖아요.”

“미안해요. 시간도 늦었는데, 먼저 들어가세요.”

“기다릴게요. 빨리 오세요.”



전화를 끊고 차에 오른다. 누군가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연변댁이 달려왔다.



“오셨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됐어요. 식사하셔야죠.”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도식이 기다리겠다. 빨리 들어가 보세요.”

“식사는 챙겨두었으니 꼭 드세요..”



연변댁은 다시 한 번 강조하더니 집으로 향했다. 식탁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가 보인다. 오는 시간에 맞추어 끊인 모양이다. 연변댁의 정성이 보아서라도 넘어가지 않은 밥알을 억지로 삼킨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큰 틀에서 아내에게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좋을지 모르겠다. 모든 사실을 밝히고, 나와 그놈 중 선택하라고 할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때론 불편한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내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내는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 설사 돌아온다 해도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워 불행한 부부생활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연변댁이 도착하기 전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으니 점심시간에 만나자고 했다. 아내는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싫다는 말은 안한다. 연변댁에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마음이 급하니 속도계가 140Km를 훌쩍 넘어간다. 중간, 중간 감시카메라에서 앞에서 잠깐 속도를 줄인 차는 140Km 이상으로 달려 12시가 되기 전에 아내의 직장근처에 도착했다. 가까운 레스토랑에 들어가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12시 10분쯤에 식당으로 들어왔다. 짧은 정장치마와 쇠골이 보일 정도로 풀어헤친 블라우스, 진한 화장이 거슬린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지우고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니 아내가 테이블로 찾아와 자리에 앉는다.



“당신이 웬일이야.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네.”

“배고프다. 우리 음식부터 주문하자.”

“그래. 여기 스테이크 맛있어. 그거 먹자.”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그래! 무슨 일이야. 혹시 경서 때문에 온 거야.”

“아니야. 당신 보고 싶어서 왔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하세요. 당신이 언제 나한테 관심이나 있었어.”

“미안해. 자리 잡기까지 바빴잖아. 당신이 좀 이해 해죠.”

“어찌되었던 남편하고 이렇게 단둘이 식사하니 기분은 좋네.”

“요즘도 여전히 바빠.”

“그렇지 뭐~ 여기저기서 민원 터지고, 상사는 쪼고, 힘들어 주겠어.”

“그래. 당신도 힘들구나. 어~ 음식 나왔다.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아내는 정말 기분 좋다는 듯이 빙긋빙긋 웃으며 맛있게 식사한다. 그놈 앞에서도 저렇게 환하게 웃을까? 사진에서 보았던 아내의 넋 빠진 얼굴이 오버랩 되며 식욕이 사라진다.



“당신 왜 안 먹어! 맛있는데.”

“당신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불러.”

“이 남자가 오늘따라 왜 이래. 당신 뭐 잘못 먹었어.”

“하하하~ 휴게소에서 군것질 좀 했더니 배가 불러서.”

“아침 안 먹고 왔어?”

“누가 챙겨주나, 당신이 옆에 있으면 몰라도.”

“혼자 있다고 밥 굶지 말고, 꼬박꼬박 챙겨 먹어. 그러다 몸 상하면 어쩌라고 그래.”

“저기........경미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 아내도 포크를 내려놓고 바라본다.



“당신 입에서 경미라는 이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그래 할 이야기가 뭐야. 밥이나 먹자고 이리 급히 오진 않았잖아?”

“펜션도 안정되고, 버섯농장 준비도 이제 끝났어. 우리 다시 합치자.”

“나보고 시골로 내려오라는 말이야?”

“당신도 직장생활 힘들다고 했잖아. 시골이라고 농사만 짓는 것도 아니고, 수입도 우리 세 식구 충분히 먹고 살 만큼은 벌어. 시골에 내려와서 편하게 살면 당신도 좋지 않아.”

“..........”

“그리고 나도 이제 혼자살기 지쳤어. 당신도 보고 싶고, 영이도 보고 싶고, 우리 부모님이나 장인, 장모님도 볼 때마다, 언제 다시 합칠 거냐고 성화시잖아?”

“휴~ 꼭 내가 내려가야 해. 당신이 올라오면 안 돼?”

“당신도 불가능한 거 알잖아. 내가 어떻게 다시 올라오니.”

“생각할 시간을 좀 줘~”

“지난 2년이라는 시간이 부족해. 또 무슨 시간을 달라는 거야.”

“아무런 상의도 없어, 당신이 먼저 벌린 일이야.”

“그걸 따질 때는 이미 지났잖아. 우리 현실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



아내는 입술을 깨물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힘들게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말까지만 시간을 줘~ 맡은 일은 정리해야지. 그리고 내년 초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때는 결정할게.”

“올해 말이면 3개월 남았나?”

“그래. 딱 3개월~ 더 기다려 달라고 안 할게. 그럼 되지.”

“좋아. 영이도 중간에 전학 가는 것보다는 새로운 학기에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시작하는 편이 적응하는데 더 좋겠지. 딱 3개월이야. 그때는 내려가는 거야.”



아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 이것이 내가 아내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식사가 끝나고 아내는 조심해서 내려가라는 말을 남기고 직장으로 향했다. 3개월 후에 아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이제 모든 선택은 아내가 하는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그놈과 아내와의 일을 마음속에서 지우기로 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며칠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기로 다짐한 것이다.



펜션 앞에 차를 세우고 주문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며칠 전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펜션으로 돌아가려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빌어먹을, 아내와 이름이 똑같은 김경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장님!”

“경미학생, 반가워요. 작업은 잘되고 있죠.”

“예! 교수님과 상의해서 몇 가지 시안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주에 혹시 시간되시면 보여드리려고요.”

“저야. 언제라도 좋아요. 경미학생 편한 시간을 말씀해 주세요.”

“그래요. 그럼 이번 주에 제가 조원들과 함께 내려갈게요. 잠은 재워주시는 거죠?”

“하하하~ 당연하죠. 그런데 몇 분이나 오세요.”

“이번에는 저랑 수정이만 가요. 남자선배들은 이장님 얼굴 뵙기 민망하다고 하네요.”

“그래요. 알았어요. 방은 미리 준비해 둘게요. 금요일에 오시는 거죠.”

“예! 학교 끝나고 바로 갈게요.”

“그럼 그때 뵙죠.”



전화를 끊고 펜션으로 들어갔다. 본체에 들어서니 연변댁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 빨리 오셨네요.”

“좀 밟고 왔어요. 저기~ 이번 주말 예약상황이 어떻게 되죠?”

“오늘 예약 다 끝났어요.”

“빈방이 없다는 겁니까?”

“요즘 단풍철이라 손님이 많아요. 더구나 막걸리체험도 인기폭발이라 더 그랬죠.”

“이걸 어쩌나.”

“왜요?”

“CI만들어 주는 학생들 있잖아요. 이번 주말에 오기로 했거든요.”

“걱정이네. 방이 없는데, 어떻게 하죠?”

“가만 있자. 2명인데, 좋은 방법이 없나?”

“2명이라고 하셨어요. 그럼 여기 2층 주면 되겠네.”

“아~ 이층 방이 있었구나. 일단 전화부터 해봐야겠네요.”



경미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를 하니 자기들은 상관없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마을 홍보 및 특산품 판매를 위한 사이트를 만드는데 매달렸다. 어쩌면 아내와의 일을 잊기 위해 더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연변댁은 요즘 들어 심통을 부린다. 아무리 유혹해도 일에만 빠져 반응이 없으니 자기 딴에 화가 난 모양이다. 시간이 화살처럼 흘려 금요일이 되었고, 저녁 늦게 경미일행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왔다.



읍내에 있는 버스 터미널로 가보니 커다란 가방을 둘러맨 경미와 수정이가 보인다. 경미는 역시 청바지에 하얀색 남방을 걸치고 있고, 수정이는 엉덩이만 겨우 가릴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에 바바리 코드를 입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들 많았어요.”

“아~ 이장님!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자~ 빨리 갑시다.”



경미일행을 태우고 펜션에 도착해 본체로 들어왔다.



“이층 방을 정리해 두었으니 짐부터 풀고 내려와요.”



경미일행이 이층에 짐을 내려놓고 파일 철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수정은 몸매가 그대로 드려날 정도로 몸에 달라붙은 쫄티를 입고 있었다. 바바리코트 안에 쫄티를 입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식사 전인가요? 안 드셨으면 차려드릴게요.”

“출발하기 전에 대충 먹고 왔어요. 혹시 술이나 있으면 좀 주세요.”



수정이 밥 대신 술을 찾는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술 참 좋아한다.



“애는~ 무슨 또 술이니, 이장님 안 주셔도 돼요. 그냥 음료수나 주세요.”



경미가 수정에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계집에! 싫으면 넌 먹지 마. 이장님! 전 술 주세요.”

“너 어제도 마셨잖아. 또 내일 등산하기로 한 약속 잊었어.”

“술 마신다고 등산 못하나. 걱정 붙들어 매시게.”



두 사람이 티격 대는 사이에 냉장고에서 음료수와 술을 꺼내고, 안주도 준비했다.



“싸우지들 마시고, 각자 원하는 것을 드세요.”

“역시 우리 이장님! 짱이라니까?”



수정이 얼른 자리에 앉더니 술을 따르고, 경미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이장님! 여기요. 5가지 시안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3가지로 압축해서 가져왔어요. 보시고 선택해 주세요.”



파일 철을 넘겨보니 초록색을 기본으로 해서 3가지 기본 시안이 그려져 있었다.



“이거, 언제까지 답변 드려야 하죠?”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혼자 결정하긴 힘들고, 내일 마을 회의를 걸쳐 결정할 게요. 참~ 두 사람은 언제 올라갈 거죠?”

“이장님만 괜찮으시면 일요일에 올라가려고요.”

“이틀 동안 뭐하시게요?”

“지리산 두레길이 유명하다고 해서 한번 가보려고요.”

“두레길은 하루 걷을 수 있는 Km를 기준으로 코스별로 나누어져 있어서, 다 돌려면 최소 며칠은 걸려요.”

“그래요. 그럼 가까운 곳이나 다녀와야겠네요.”

“하여튼 일요일에 올라간다는 말이죠. 알았어요. 편하게 지내다 가세요.”

“자~ 이야기 끝났죠. 이제부터 마셔봅시다. 이장님! 받으세요.”



경미와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수정이 술을 따라준다. 수정이 강권하니 경미도 어쩔 수 없이 술을 받았다.



“자~ 우리 멋진 이장님을 위해 건배.”



수정이 계속하여 건배를 외치니 분위기상 안 마시수도 없어, 계속해서 마시게 되니 식탁에 빈병이 싸여간다. 4병정도 마셨을 때, 수정이 잠시 밖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아마도 담배가 피우고 싶은 모양이다. 수정이 자리를 비우자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저기.......저번에 있잖아요.”



침묵을 깨고 경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예! 말씀하세요.”

“이장님! 다 보신 거죠?”

“뭘 봤다는 거죠?”

“그때 새벽에 A동에 다녀오셨다고 하셨잖아요. 또 저에게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그때 다 보시지 않았어요?”

“학생들이 같이 자는 모습은 봤어요.”

“정말 그게 다예요?”

“예! 뭐 또 다른 것이 있었나요?”

“아니에요.”



경미는 시선을 피하며 말을 얼버무린다. 귀엽다. 예전 아내도 지금 눈앞에 있는 경미와 마찬가지로 수줍음이 많았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 조장이란 친구한데 고백은 해 봤어요?”

“고........고백이요?”

“그때 조장이 좋다고 했잖아요?”

“제가 그런 말을 했어요?”

“경미학생은 좋은데, 조장은 자꾸 다른 여자만 바라본다고, 그래서 속상하다고 했잖아요.”

“전혀~~ 아니에요. 술 마시고 헛소리를 한 모양이네요.”

“취중진담이란 말도 있는데, 진짜 아니에요?”

“정말 아니라니까요.”



경미가 버럭 화를 내며 큰소리로 말한다.



“아니면 말지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아니 이장님께서 자꾸.........하여튼 조장하고는 아니에요. 행여나 수정이 있는데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알았어요. 근데, 수정학생 늦네. 나가봐야 하나.”

“저기 들어오네요.”



수정이가 다시 자리에 앉더니 잔들을 살펴본다.



“뭐야. 그대로네. 경미. 오늘 이상하다?”

“뭐가?”

“원래 잘 마시잖아. 이장님 앞이라고 내숭떠는 거야?”

“계집애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자~ 술이나 마셔.”



경미가 수정과 건배하고 단번에 마시고, 수정은 피식 웃더니 잔을 비운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갑자기 담배가 댕겨서........다녀올게요.”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시원하다. 수정의 강권에 벌써 1병 이상을 마신 것 같다. 담배를 빨아 댕기자 머리가 어지럽다. 술을 마시면 혈액순환이 빨리 지고, 그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면 니코틴 흡수까지 빨라진다고 한다. A동에서 D동까지 친구나 가족단위의 손님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귀가를 스친다. 나름대로 꾸며 놓은 정원을 산책하며 담배를 피우다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스산한 가을바람에 외로움이 몰려온다. 모두 타버린 담배공초를 버리고,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댄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는데, 식탁에 쌓인 빈병 숫자가 늘어났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가?



“어~ 이장님 오셨네. 왜 이제야 오세요. 자~ 빨리 앉으세요.”



수정이 반쯤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또한 경미를 보니 눈동자도 반쯤은 풀려 있다.



“피곤하지 않아요. 이제 주무셔야죠.”

“조금만, 조금만 더 마시고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었거든요.”



더 마시겠다는 사람, 억지로 말릴 생각은 없다. 남겨두고 간 잔을 비우고, 술을 채운다. 외로운 때문인지 술이 댕기는 모양이다.



“이장님! 경미 어때요.”



뜬금없는 수정의 질문에 가볍게 대답한다.



“예뻐요!”

“사모님과 이름도 똑같고, 얼굴도 똑같다면서요?”

“얼굴은 아니고, 이름은 같아요.”

“어~ 경미가 했던 말하고 틀리네. 야~ 김경미~ 너 뻥쳤지.”



경미가 탁자에 팔을 걸치고, 바라보는데 머리가 가만있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 많이 취한 모양이다.



“이장님~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기억 안나요?”

“이제야 기억나네요. 요즘 들어 가끔 깜박깜박해요.”

“이겨봐~ 내말이 맞잖아?”

“치~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장님! 오늘 경미. 왜 왔는지 아세요?”

“CI 때문에 오셨잖아요.”

“이거 봐~ 이거 봐~ 경미야. 내말이 맞지.”



경미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남아 있는 잔을 입속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미없어. 나 잔다.”



경미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년은 지가 불리하면 도망가요. 그래~ 자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도착한 경미가 한 계단 올라가다가 손잡이를 붙잡고 쓰려진다. 술에 취하여 몸도 가누지 못하는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연달아 3잔을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어지럽다. 하지만 그냥 둘 수 없기에 머리를 짧게 흔들고 계단으로 걸어가 경미를 일으켰다.



“누구야. 이거 안나. 놔란 말이야.”



경미가 힘없이 내젖는 팔을 잡아 목에 두른 다음, 허리를 붙잡고 계단을 오른다.



“이씨~ 놔아아아~”



완전히 만취한 경미를 부축해서 계단을 오르니 등줄기에 식은땀에 흐른다. 이층 방에 도착해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히며 목에 두른 팔을 풀어주니, 힘없이 쓰려진다. 일단 경미를 그대로 두고 장에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깔았다. 이제 이불위로 옮겨야 하는데, 경미는 이미 꿈나라로 가셨다. 양쪽 무릎과 목 사이에 양팔을 끼우고 경미를 안아 이불위에 눕혔다. 이제 이불만 덮어주면 된다. 몸에 쫙 달라붙은 스키이진을 입고 있어 불편해 보이지만 이불을 덮어주고 밑으로 내려왔다.



“수정학생도 이제 자야죠?”

“이장님! 앉으세요. 저 아직 안 취했어요. 조금만 더 마셔요.”



경미 덕분(?)에 땀을 흘리고 왔더니 술기운이 달아났다. 이제 10시 조금 넘은 시간이라 정신도 멀쩡하고 졸리지도 않으니 수정학생과 조금 더 마셔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수정의 앞에 다시 앉았다.



“자~ 이번 잔은 천천히 드세요.”



수정의 목소리에 취기가 없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갑자기 멀쩡해 졌네요.”

“이장님과 단둘이 있으니 긴장해서 그래요.”

“하하하~ 수정학생이 저 때문에 긴장할 일이 뭐가 있어요?”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게 뭔데요?”

“저번 새벽에 A동에 오셨었죠?”

“걱정되어 가봤죠. 그게 중요해요?”

“다 보셨죠? 이불까지 덮어주고 가셨잖아요.”

“보긴 봤죠. 이름이 뭐냐? 하여튼 그 남학생하고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근데 왜 경미에게는 거짓말 하셨죠?”

“거짓말이라니.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죠?”

“경미에게는 아무것도 못 보신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구체적으로 말을 안했을 뿐이지, 그게 거짓말은 아니죠. 그리고 내가 왜 수경학생에게 그 일에 대해 추궁을 당해야 하는 거죠?”

“그날 밤. 이장님께서 경미를 능욕하셨잖아요.”



비록 눈빛은 탁하지만 술에 취해 헛소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능욕(凌辱)이란 단어의 뜻은 알기나 하는 것일까? 불현듯 힘들게 잊으려던 아내의 일이 생각나 분노가 치민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찾고 차분하게 대응한다.



“무슨 근거로 그런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는 거죠?”

“경미는 그날 펜션에 없었어요. 바로 이장님과 함께 있었죠. 이미 경미에게 확인했으니 아니라는 말씀은 못하겠죠.”

“좋아요. 함께 있었다고 칩시다. 그게 능욕이란 단어하고 어떻게 연결되죠? 수정학생,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거 아닌가요?”

“경미 같은 숙맥이 먼저 유혹할리는 없으니, 이장님이 덮진 것이 확실하죠. 그게 능욕이 아니면 뭐예요.”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그날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내가 경미학생, 손끝하나 건드렸다면 손에 장을 지저요.”

“오늘 경미가 굳이 여기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CI는 메일로 보내드려도 그만이에요. 경미가 이장님 보고 싶데요. 혼자오기 민망하니 함께 가제요. 경미가 왜 이장님 같이 나이 많은 늙은 아저씨를 보고 싶어 할까요? 그날 이장님과 경미사이에 남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으며, 그 비밀이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경미 같은 숙맥 먼저 유혹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장님이 경미를 꼬드겨 능욕을 하신 거잖아요.”

“아주 소설을 쓰는군. 참는데도 한계가 있으니 그만하시죠. 꼭지 열리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러니까 경고하는데, 조용히 술이나 드시고 올라가서 자빠져 주무세요.”

“할 말 없으니 이제 협박하시는 건가요?”



욱하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내가 왜 이런 좆만한 년에게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추궁을 당해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예의는 필요 없다.



“자기가 막나가니 남도 그런 줄 아는 모양이지?”

“제가 막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한 쌍은 마루에서, 한 쌍은 방에서, 더구나 친구들도 있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퍽하게 뒹굴지 않았나?”

“오~ 옆에서 보신 것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시네요. 그래요. 했어요. 그게 뭐가 잘못 됐죠. 청춘남녀가 좀 과하게 놀았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게 만인의 지탄을 받을 일도 아니고, 법적으로도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하지만 이장님은 아니죠. 유부남이 나이어린 학생을 능욕한 거잖아요.”

“자꾸 능욕(凌辱)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알고나 쓰는 거야?”

“뭔데요. 이장님이 말씀해 보세요.”

“허 참~ 이것이 진짜~~ 한번 직접 몸으로 체험시켜 줄까?”

“어떻게 체험시켜 주실 건데요? 궁금하네요.”



수정이가 들고 있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빈정대듯이 말한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이젠 화도 나지 않는다. 어린년의 말 같지 않은 억지에 화를 내는 것도 우습고, 변명하는 것도 체면이 말이 아니니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만하자. 올라가서 자라.”

“이젠 도망치시는 거예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끝까지 시비를 건다. 이년이 죽으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다.



<< 다음 편에 계속 >>





ps : 15부 댓글 중, 호적수에게 지면 라토라레고, 이기면 헬림물이라는 글을 보고 바로 뿝였습니다.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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